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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서울 사람들은 언제부터 도장을 사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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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서울 사람들은 언제부터 도장을 사용했을까?
  • 신용섭 기자
  • 승인 2024.01.2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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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서울미래유산기록 시리즈의 네 번째『서울의 인장포』발간
서울미래유산기록4『서울의 인장포』보고서

[서울포커스] 서울역사박물관장은 2023년 서울미래유산기록 사업의 결과를 묶어『서울의 인장포』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2020년부터 시작한 서울미래유산기록 사업은 근현대 시민생활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주제 조사로 추진돼 낙원떡집, 서울의 대장간, 서울의 이용원을 조사한 바 있다. 이번에 발간한 서울미래유산기록 시리즈의 네 번째는 ‘서울의 인장포’다.

생활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인장 문화는 전통예술의 측면에서도 계승·발전시켜야 할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흔히 ‘컴퓨터 도장’이라 불리는 기계 조각 인장이 등장하면서 인장의 고유성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아직도 수조각(手彫刻) 인장을 고집하며 개인의 신표(信標)를 만들고 있는 인장 명장들이 있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인장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이다. 1912년에 '인판업취제규칙'의 제정으로 ‘인장업’이 처음 제도적으로 규정됐다. 이에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인장을 갖고, 사용하게 됐다.

조선시대 한국의 인장은 크게 새보(璽寶), 관인(官印), 사인(私印)으로 구분된다. 개인이 사용하던 인장인 사인(私印)은 서화(書畫)의 낙관(落款)이나 서적의 장서인(藏書印) 정도에 그쳤다.

우리나라의 인감증명제도는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합법적으로 보호하고, 조선인들의 경제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4년에'인간증명규칙'을 반포하며 강제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인감제를 실시함에 따라 인장을 전문으로 제작해 주는 인장포가 일제강점기에 처음 생겨났다.
1974년에는 '국가기술자격법'의 시행으로 인장공예기능사(1급·2급·기능사보) 자격시험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응시 수요 감소로 인해 2004년에 폐지됐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반 상업 인장이 시작됐어요. 왜냐하면 인감 규칙이 생기면서 모든 서류에 인장을 찍어서 본인을 증명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나라에 인장포가 생겨난 거예요” 이동일(남, 1939년생, 옥새당) 인터뷰

1999년'인장업법'이 폐지되며 1912년에 제정된 '인판업취제규칙'이래 87년간 유지돼 온 인장업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현행법 중 인장과 관련한 법은 '인감증명법'이 유일하다.

2000년대 들어 컴퓨터 인장 제작과 서명 거래가 일반화되고, 공인인증서 도입 등을 거치며 인장업은 줄곧 사양산업의 길을 걷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인장은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확장하고 있다. ‘탯줄 도장’이나 ‘수제 도장’이라 불리는 캘리그래피 디자인 한글 인장이 대표적이다.

1950년대부터 서울에서 활동해 온 박인당(博印堂), 거인당(巨印堂), 옥새당(玉璽堂), 여원전인방(如原篆印房), 인예랑(印藝廊) 5곳의 오래된 인장포를 조사했다. 이들 인장포는 소재지에 따라 다른 장소성을 나타내며 운영자마다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도심부 인장포의 터줏대감, 박인당(博印堂)의 박호영 박인당은 인장포 중 유일하게 서울미래유산(2020-004호)로 지정됐다. 1978년부터 관철동에서 ‘박인당’이란 상호로 운영하고 있다. 박인당 박호영은 1938년에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출생한 피란민이다. 6·25전쟁을 겪으며 피란민의 배급 도장을 만든 것이 인장업에 종사하게 된 계기가 됐다. 1954년 상경해 중구 신당동, 을지로5가, 수하동, 다동 등지에서 여러 인장포를 운영하며 인장 기술을 익혔다. 2004년에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인장업의 혁신을 이끈, 거인당(巨印堂)의 유태흥 거인당은 서울에서 유일한 인장 특성화 거리인 ‘창신동 인장의 거리’에 있다. 창신동에서 손꼽히는 ‘하청 전문 업체’였지만 몇 해 전부터 직원 없이 운영 중이다. 거인당 유태흥은 1941년에 경기도 파주시에서 출생했다. 1960년에 상경해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인장부에 취업해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중구 북창동과 충무로를 거쳐 1978년에 종각에서 ‘거인당’을 개업하고, 1983년에 창신동으로 이전했다. 유태흥은 인장업에 종사하면서 수조각 기계, 진열용 샘플 등 다양한 인장 관련 제품과 기계를 고안해 인장업 발전을 이끌었다. 2008년에 대한민국 인장 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신세계백화점 인장 코너 35년, 옥새당(玉璽堂)의 이동일 옥새당은 1975년에 신세계백화점에 입점했다. 백화점의 운영 방침상 독자 상호를 사용할 수 없어 2009년에 백화점 매장을 닫을 때까지 ‘신세계백화점 인장 코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백화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35년 동안 운영한 유일한 인장포다. 옥새당의 이동일은 1939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했다. 1961년에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울에서 인장업을 시작했다. 인장업계에서 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로 2002년에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인장 기술의 가치를 널리 알린, 여원전인방(如原篆印房)의 최병훈 여원전인방은 1977년부터 30여 년 동안 강북구청 앞 3평 공간에서 ‘삼양사’ 라는 상호로 운영됐다. 강북구가 도봉구, 노원구로 분구될 때마다 새로 개설한 자치구 행정에 필요한 인장과 고무인을 제작했다. 2009년에 현재 위치(수유동 293-3)로 이전하면서 명칭을 ‘여원전인방’으로 변경하고 인장 연구소 겸 작업실로 운영하고 있다. 여원전인방의 최병훈은 1950년에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출생했다. 1964년에 상경해 학교와 인쇄소에서 필경사로 일했다. 1976년에 (사)한국인장업연합회에서 실시한 인장 기술 교육을 수료하고 인장업에 입문했다. 1985년에 한국인전연구회를 설립하고, (사)전통공예기능보존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는 등 인장 제작 기법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해왔다. 2001년에 대한민국 인장공예 부문 1호 명장에 선정됐다.

인장 기술에서 예술로, 인예랑(印藝廊)의 황보근 인예랑은 1985년부터 종로구 인사동에 터를 잡은 인장포다. 인사동 쌈지길 부근에 처음 자리를 잡고 인근에서 2~3번 자리를 옮겼다. 10여 년 전 건국 빌딩으로 이전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인예랑의 황보근은 1950년에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출생했다. 1971년에 상경해 스승 유태흥의 도움으로 종각에서 10년간 인장업을 했다. 1980년대부터 인장의 더 높은 경지를 위해 서법(書法)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예와 전각에 몰두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장업계에서 유일하게 서예와 전각의 예술성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2012년에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6·25전쟁이 끝나고 생계 수단을 잃은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여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장업은 손재주가 있는 상경민이 ‘사장님’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업종이었다. 책상만 있으면 작업이 가능해 창업의 진입 장벽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조사한 서울의 인장포 5곳은 모두 1950년대 이후 상경한 지방민이 운영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한자를 공부했고, 남다른 손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에 정착하고 오래지 않아 작은 인장포를 열고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인장포 하는 사람들은 5·16 이후에 다 지방에서 온 거예요. 그때부터 서울에 회사가 많이 생기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반도호텔 근방이 다 회사였어요. 옛날에는 관공서에서 문서를 처리하는 데 사용하는 인장이 300~400종에 달했어요. 그래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죠. 인장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인쇄 기술자보다 인장 기술자가 훨씬 벌이가 좋았어요.” 유태흥(남, 1941년생, 거인당) 인터뷰

서울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면서 내 점포를 마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인장포는 다른 업종과 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인장 작업에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인데, 인장업에서는 이를 ‘겹살이’라 칭한다. 특히 유사 업종인 인재사(印材社)나 인쇄소, 문구점 등의 한쪽 공간을 이용해 영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프셋인쇄와 컴퓨터가 대중화하기 이전인 1990년대 초까지는 인장포에서도 활판인쇄 방식으로 명함, 봉투 등 소규모 인쇄를 겸했다. 또 수기 문서작업에 필수적인 사무용품을 취급하는 문구점과 행정(行政)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각종 인장은 실과 바늘 같은 관계였다. 이런 까닭으로 도심에 있는 대형 문구점이나 창신동과 인현동의 인쇄소에는 ‘인장부’가 있었다.

“1964년에 을지로5가에 있는 인쇄 가게 문 앞에 책상 하나 빌려서 독립을 했어요.” 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 “가게에 책상 하나씩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많을 때는 조각사가 한 5~6명 있었어요. 그래서 1970년대부터는 도장은 안 새기고 그냥 세 받으면서 재료만 취급했죠.“ 박순옥(남, 1930년생, 영광인재사) 인터뷰

서울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 동안 압축성장을 했다.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기 이전 서울의 주요 시설과 기업체는 사대문 안쪽 지역에 밀집했다. 당연히 그 시기 서울의 인장포는 대표적인 상점가인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 자리했다. 이후 구로공단, 여의도 개발 등 굵직한 도시 개발을 쫓아 인장포도 이동해 영업을 이어갔다.

“내가 인장 배우면서 처음 했던 곳은 다동 58번지였어요. 거기서 선생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그 옆으로 옮기고, 또 옮기고 그랬죠. 또 구로공단 한일은행 바로 옆에 있다가 군대 갔다 와서 1977년에 대일사를 개업했어요. 거기서 2년 있다가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이 있는 중앙빌딩으로 옮겼죠. 1980년에 여의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풀밭이었어요.” 조규호(남, 1957년생, 한국인장협회 회장) 인터뷰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현대식 고층 건물과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 주차장과 공원을 만들어 도심을 현대화·고도화하는 ‘도심재개발’ 사업이 전개됐다. 이에 따라 도심의 저층 고밀 건물의 상가를 임차한 인장포들은 도심재개발과 함께 잦은 이전을 하며 부침을 겪었다.

“지금 영풍문고 짓기 전에 그 앞에 가게들이 쭉 있었어요. 그중 하나를 보증금 50만 원에 얻었어요. 공간은 한 평도 안 됐어요. 손님 하나 들어오면 꽉 차는 가게였어요. 그렇게 1년 반쯤 했는데 빌딩 짓는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보증금 50만 원에 위로비 150만 원을 받아서 구몬빌딩에 480만 원짜리 가게를 얻었어요. 거기서 한 10년 했죠. 그런데 또 빌딩 짓는다고 비워달라는 거예요.” 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

서울역사박물관 최병구 관장은 “인장은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일부 국가의 특수한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독창성과 예술성을 지닌 수조각(手彫刻) 인장의 전승 단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인장 세공 기술과 도구를 현장 조사 방식으로 생생하게 기록해냈다는 점에서 앞으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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