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그 1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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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그 1년의 기록
  • 서울포커스 기자
  • 승인 2022.06.2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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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노량진, 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보고서 발간
노량진‘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그 1년의 기록

[서울포커스신문] 서울역사박물관은 2021년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사업의 결과로'노량진, 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보고서를 발간하였다고 20일 밝혔다.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급격하게 변화해 온 서울의 특징적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서울역사박물관 대표 조사연구 사업이다.

오늘날 노량진은 전국을 대표하는 공무원 학원가와 고시촌, 수도권 최대 수산물 도매시장인 노량진수산시장, 개항기 최초의 철도역이자 지하철 1‧9호선 환승 노량진역, 컵밥거리 등 다면적 성격을 형성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이러한 노량진의 다면적 성격이 언제, 어떻게 형성됐으며, 현재 어떤 변화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이래 노량진은 도진촌락(渡津村落)으로서 도성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강 이남에 위치한 노량진은 서울에 속하지 못하고, 서울(경성)에 땔감을 파는 공급처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한강철교(1900)와 한강인도교(1917, 한강대교)가 놓이면서 노량진의 나루터 기능은 상실됐다. 하지만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된 노량진은 철도와 전차가 지나며 서울과 인천, 강북과 강남을 잇는 도시화의 전이지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월파정은 1776년 정조가 노들강 기슭에 세운 것이라 전해진다. 조선 중기 이래 장유(張維, 1587~1638)의 별서로 명성이 높았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재벌 아라이 하치타로(荒井初太郎)가 이 일대 땅을 소유하며 양식 별장으로 신축됐다.

해방 이후에는 라바울 마담(본명 김정순)이 적산가옥이었던 아라이 저택을 매입해 미군과 한국인 고위 관리를 상대로 하는 사교장을 운영하며 댄스파티를 열었다.

1950년 전후에는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 장택상의 별장이 되었다. 2005년부터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유지재단에서 소유하다가 최근에 소유권이 일반인에게 양도됐다. 현재 옛 월파정 자리에는 수산물을 취급하는 식당 옆에 고목 한 그루만 남아 그 자리를 알리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노량진역과 노량진수원지 등이 들어서면서 노량진은 도시확장에 따른 도시기반시설들이 이 지역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이러한 현상은 지속돼 도로망·상수원과 같은 시설들이 노량진역 주변으로 계속 증가했다. 노량진수원지의 확장과 한강변 도로, 수원지 주변의 여러 입체 교차로의 모습은 서울의 급속한 팽창이 만들어 낸 도시 경관의 대표적 사례다.

노량진수원지는 본래 서울이 아닌, 인천 상수도의 급수를 위해 만들어졌다. 인천은 중요한 무역항 중 하나로서 민간급수는 물론 선박급수 또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노량진수원지는 1910년 10월 통수식을 하고, 12월 급수를 개시하였다. 처음에는 관영으로 수도를 운영했지만, 1922년 인천으로 무상양도 되었다. 1948년 5월에 비로소 서울로 관할권이 이관되었다.

1967년 노량진역 북쪽으로 한강변을 따라 최초의 유료 자동차전용도로인 강변1로(현 노들로)가 건설됐다. 한강변 도로의 건설은 서울의 확장 과정에서 기반시설의 확충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노량진 일대를 크게 바꾸어 놓은 사업이었다.

한강변 도로는 노량진수원지 일대에서부터 여의도 남단의 강변을 따라 이어지며 강변의 상습 침수구역을 막는 제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노량진역 북쪽으로 한강변에 택지 2만 2,000평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1971년 노량진수산시장이 건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량진에 학원이 최초로 들어선 것은 1977년 정부의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 계획’에 따라 사대문 내 학원을 사대문 밖으로 이전하는 ‘도심학원 이전계획’이 실시되면서부터다. 이 계획에 따라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 밀집해 있던 학원들은 각각 노량진‧강남‧용산 등으로 이전했다. 이때 재수학원의 한 축을 담당하던 대성학원이 1978년 노량진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9년부터 대형종합학원과 중소 규모의 기술학원, 정진학원·한샘학원 등 단과학원들도 이전했다. 이로써 노량진은 1980년대에 본격적인 학원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노량진 학원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노량진로에 면해 있던 대형 재수학원과 단과학원들이 문을 닫거나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를 공무원학원이 대체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는데, 1993년 수능 제도의 도입과 대치동 학원가의 부상이 재수·단과학원의 노량진 이탈을 불러왔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공무원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면서 소수의 유명 강사를 중심으로 한 중·소규모 공무원학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노량진은 ‘공무원 시험 합격을 위한 메카’가 되었다.

중소 규모의 학원들로 구성되었던 노량진 학원가는 2010년대 초반 ‘해커스’와 ‘공단기’, 2010년대 후반 ‘메가스터디’ 등의 대형학원이 공무원 수험시장에 진출함에 따라 대형학원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학원들은 이미 종로와 강남 등지에서 어학·입시 관련 교육 서비스를 제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공무원 학원가에 변화를 몰고 왔다.

가장 큰 변화는 인터넷 강의 시스템의 도입이다. 인터넷 강의의 도입은 현장 강의를 중심으로 운영하던 노량진 학원가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온라인플랫폼의 등장으로 노량진을 찾는 수험생 자체가 줄게 되었다. 게다가 대형학원들이 막대한 자본력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 경쟁력을 잃은 군소학원이 대다수 문을 닫았다.

노량진에 ‘공시생’이 있다면, 신림동에는 ‘고시생’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공직자 임용 시험을 준비하기에 범위와 난도가 다를 뿐 법 과목 등 유사한 공부를 한다. 때문에 노량진과 신림동 고시촌에는 닮은 점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사에게 ‘교수'라는 호칭을 하는 것이다. 이 연원은 신림동 고시학원의 출발에서 찾을 수 있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는 초창기 현직 교수를 강사로 초빙했다. 이 교수들은 대학교재를 집필하는 당시 해당 분야의 대가(大家)였다. 학원에서 대학교수가 직접 강의했기 때문에 호칭이 당연하게 ‘교수’가 되었는데, 더이상 대학교수가 강의하지 않는 지금까지 관례가 되어 노량진 공무원학원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10년 이전 노량진에서는 공무원 시험 교재를 출판하는 출판사가 학원 강사의 에이전시 역할을 겸했다. 필자인 강사의 요구사항을 출판사에서 대신 학원에 전달 하거나, 다른 학원으로 이적(移籍)하는 과정에서 계약금 조율 등을 담당하였다.

또 출판사가 직접 신진 강사를 발굴해 학원가에 데뷔시키고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조력자 역할을 해주며 관계를 돈독히 다져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노량진에 진출한 대형학원들이 강사와 계약을 통해 학원 자체적으로 출판을 하게 되면서 노량진에 있던 기존 출판사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대형학원들은 ‘강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수험생들의 생활을 ‘관리’하는 데 집중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현상이 ‘관리형 독서실’의 등장이다. 관리형 독서실은 학원과 독서실이 제휴를 맺는 방식과 학원이 직접 운영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관리형 독서실에서는 학원의 인터넷 강의를 기본 제공하고, 독서실 출입과 공부 시간 및 일정을 철저하게 관리해 준다. 이러한 소위 ‘스파르타’ 관리 서비스는 학입시 과정에서 이미 이러한 관리시스템을 경험한 수험생들의 요구에서부터 시작됐는데, 인강을 활용한 수험 준비가 보편화하면서 자신을 구속해 공부하게 하려는 장치다.

'노량진, 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보고서는 서울역사박물관 누리집에서 열람할 수 있다. 구입은 서울책방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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